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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원주민 37명 “고향으로 날 보내주”

(주)대성테크 2009. 4. 27. 19:04

[땅과 사람들](1)월미도 원주민 37명 “고향으로 날 보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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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 박정환기자 | 입력 2009.04.27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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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세상이 잔혹하고 현실이 남루하다 하더라도 인간은 땅을 벗어나서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다. 팽개칠 듯 미워하다가도 땅을 부둥켜안고 쓰다담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다. 인간 군상들의 삶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는 그 대지는 사회적 풍경을 담을 수 밖에 없다.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이들의 하염없는 슬픔, 현실에 웅크리고 일상에 주저앉은 소시민들의 체념,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욕망을 달성하려는 자들의 게걸스러움, 그 탐욕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함성… 지금 인천의 대지에서는 굴착기의 공격적인 굉음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있다. 국제도시, 명품도시의 깃발 아래서 그 파헤침은 거침이 없다. 인천경향신문은 인천 곳곳의 땅을 찾아다니며 곧 기억에서 희미해질 그곳의 사연과 그 대지 위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인천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중 시리즈로 마련했다.(편집자주)

인천상륙작전으로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인천시 중구 북성동 월미도가 인천의 대표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다. |김순철기자

4월 월미도 벚꽃의 흐드러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하지만 쉰아홉 해의 간극이 만들어 낸 월미도 벚꽃에 대한 월미도 사람들의 심회는 착잡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고향 등져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15일), 그 한순간의 역사적 사건은 월미도의 운명처럼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삶도 나락으로 내몰았다. 작전 감행 닷새 전인 그 해 9월10일 오전 7시. 미 해병대 검정색 폭격기 F4U-4B 2개 편대 14대는 월미도 북쪽에서 남쪽 상공을 훑기 시작했다. 작전명 '집중포격'(Saturation Bombing ·적이 있는 일정지역을 표적으로 무차별적 폭격)이었다. 미군은 인민군(주둔군 약 400명)의 요새화로 인천상륙의 최대 걸림돌로 점쳤던 월미도를 철저히 무력화할 필요가 있었다.

고도 200피트(75.6m)로 곤두박질하며 저공비행하던 폭격기는 '불의 비'를 퍼부어 댔다. 나무와 그 밑 엄폐물들을 향해 내리 꽂힌 네이팜탄에 월미도의 하늘은 불기둥과 시커먼 연기로 솟구쳤다. 연기가 걷히자 로켓과 MK-8(구경20㎜)은 또다시 불을 뿜었다.

그날 낮 12시15분까지 3차례의 폭격으로 네이팜탄만 95개나 집중 투하된 월미도 0.66㎢ 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빨려들었다. 민간인이 살던 월미도 동쪽의 건물과 덤불의 80%가, 해군 관사와 조탕(潮湯), 석탄창고가 있던 북쪽은 90%가 포탄에 폭삭 주저앉았다.

인민군의 식량 배급표를 타기 위해 새벽녘까지 방공호를 파고, 해변에 철망을 치느라 곤한 잠에 빠졌던 월미도 사람들은 느닷없는 폭격에 속옷 바람으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일부는개흙을 몸에 바른 채 월미도 둑 부근 갯벌에 납작 엎드려 기총소사를 피했다. 제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에 부쳤던 이름없는 부녀자와 노약자들은 그 폭격의 표적이 돼 길바닥의 주검으로 너부러졌다.

59년이 지난 지금도 고향 월미도를 잃은 37명(희생자 유족 5명 포함)은 '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란 이름으로 부평초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1950년 9월10일 융단폭격으로, 잇따라 터진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 군사시설이 월미도에 들어오면서 민간인 출입 통제로 고향을 등져야만 했다.

미군철수 이후에도 귀향 막막

인천상륙작전 직전 고향에서 쫓겨난 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원 정석주(71)씨가 귀향대책을 요구하며 쓸쓸한 움막을 지키고 있다. |김순철기자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월미도 주민들은 대책위를 만들어 인천시청에 '내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오'를 외쳤지만, 시 당국의 답변은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미군이 철수하면 월미도에 들어가게 할 테니 걱정마라'였다. 1971년 11월20일 미군이 물러나고 해군인천경비부가 월미도를 차지한 뒤에도, 2001년 8월30일 인천시가 국방부 소유의 월미도 42만2127㎡를 439억 원에 사들여 전통공원을 꾸몄을 때도 원주민들이 돌아갈 땅은 월미도에 없었다. 귀향의 권리를 보호할 실정법이 없던 터였다.

역사적 아픔으로 넘겨버리기에는 그들이 걸어야했던 삶의 노정은 처절했다. 송곳 하나 꽂을 땅 없이 빈털털이가 된 원주민들은 월미도 어귀에 판잣집을 짓고 날품팔이와 행상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들에게 가난의 굴레는 숙명이었다. 그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고, 긴 한숨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월미도 미군 폭격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를 벌여 지난해 2월 권고조치를 내렸다. 정부는 미국과 공동조사를 하거나 원주민들에 대해 공동책임을 질 것을 주문했다.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에 대한 위령사업과 월미도 원주민의 귀향 지원을 지방자치단체에 권고했다. 하지만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권고는 구속력을 획득하지 못한 한낱 종이 쪽지에 머무르고 있다.

오는 9월이면 귀향대책위의 널빤지 농성 움막이 월미공원 입구에 세워진지 꼭 5년째다. 움막에서 만난 주민 정석주(71)씨는 퀭한 눈을 글썽이며 창밖을 향해 중얼거리듯 말했다. "월미도서 옆집에 살던 형수 형이 기어코 세상을 떴어!" 이태 전 9월 월미공원에서 위령제를 지내다가 쓰러진 뒤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다가 숨을 거둔 김형수(76)씨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창밖의 월미도 벚꽃은 화새한 봄볕 속에서 꽃잎을 흩날리고 있었다.